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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책

만월(滿月)-김동리

by 냠뇸냠 2017. 2. 22.

 

 

 

17년 수능특강 교재에 수록되어 있는데

아아 책을 사야겠다. 너무 좋다.

 

 

 

나는 지금 보름달 아래 서 있다.

나는 보름달을 좋아한다.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예외 없이 싱겁고 평범하게 마련이라면, 나는 내가 그렇게 싱겁고 평범한 사람이 되어도 하는 수 없다.

내가 가진 새벽달의 기억은 언제나 한기(寒氣)와 더불어 온다. 나는 어려서 과식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 하얗게 깔린 서릿발을 밟고 새벽달을 쳐다보는 것은 으레 옷매무새도 허술한 채 변소 걸음을 할 때였다. 그리고 그럴 때 바라보는 새벽달이란 내가 맨발로 밟고 있는 서릿발보다도 더 차고 날카롭게 내 가슴에 와 닿곤 했었다.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있어 달의 일종이라기보다 서슬 푸른 비수나 심장에 닿아진 얼음 조각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게다가 나는 본래 잠이 많아서 지금도 내가 새벽달을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선잠이 깨었을 때다.

새벽달보다는 초승달이 나에게는 한결 친할 수 있다. 개나리, 복숭아, 살구꽃, 벚꽃 들이 어우러질 무렵의 초승달이나 으스름달이란 그 연연(娟娟)하고 맑은 봄밤의 혼령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소식(蘇軾)의 '봄 저녁 한 시각은 천 냥에 값하나니, 꽃에는 맑은 향기, 달에는 그늘'이라고 한 시구 그대로다. 어느 것이 달빛인지 어느 것이 꽃빛인지 분간할 수도 없이 서로 어리고 서려 있는 봄날의 정취란 참으로 흘러가는 생명에 한스러움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단들 초승달로 보름달을 겨룰 수 있으랴. 그것은 안 되리라. 마침 어우러져 피어 있는 개나리, 복숭아, 벚꽃 들이 아니라면, 그 연한 빛깔과 맑은 향기가 아니라면, 그 보드라운 숨결 같은 미풍이 아니라면, 초승달 혼자서야 무슨 그리 위력을 나타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이미 여건(與件)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초승달이 아닌가.

보름달은 이와 달라 벚꽃, 살구꽃이 어우러진 봄밤이나, 녹음과 물로 덮인 여름밤이나, 만산에 수를 놓은 가을밤이나, 천지가 눈에 싸인 겨울밤이나, 그 어느 때고 그 어디서고 거의 여건을 타지 않는다. 아무것도 따로 마련된 것이 없어도 된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물이면 물, 수풀이면 수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족하다. 산도 물도 수풀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라도 좋다. 머리 위에 보름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황홀하고 슬프고 유감한 것이다.

보름달은 온밤 있어 또한 좋다. 초승달은 저녁에만, 그믐달은 새벽에만 잠깐씩 비치다 말지만, 보름달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우리로 하여금 온밤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보름달은 온밤을 꽉 차게 지켜 줄 뿐 아니라, 제 자신 한쪽 귀도 떨어지지 않고, 한쪽 모서리도 이울지 않은 꽉 찬 얼굴인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좋은 시간을 짧을수록 값지며, 덜 찬 것은 더 차기를 앞에 두었으니 더욱 귀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필경 이것은 관념(觀念)의 유희다. 행운(幸運)이 비운(悲運)을 낳고, 비운이 행운을 낳는다고 해서 행운보다 비운을 원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초승달이나 그믐달같이 병적(病的)이며 불완전한 것, 단편적인 것, 나아가서는 첨단적(尖端的)이며 야박(野薄)한 것 따위들에 만족할 수 없다.

나는 보름달의 꽉 차고 온전히 둥근 얼굴에서 고전적인 완전미와 조화적인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예술에 있어서도 단편적이고 병적이며 말초적인 것을 높이 사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기발하고 예리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완전성과 거기에서 빚어지는 무게와 깊이와 넓이에 견줄 수는 없으리라.